샴페인의 역사 3: 영국의 엄청난 영향력

이전 포스트에서 샴페인의 기원과 돔 페리뇽의 업적에 대해 알려드렸습니다. 돔 페리뇽 시대 샹파뉴 와인은 스파클링이 아닌 스틸와인이었고, 당시엔 탄산가스가 생긴 와인을 불량이라 여겨 탄산가스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는 내용이었죠. 

혹시, 돔 페리뇽이 활동한 수십년전부터 영국에서 스파클링 와인이 유행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돔 페리뇽 시대 이전에부터 영국에서는 강한 유리병을 만들었고, 당분을 추가하여 2차 발효로 제조된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번 포스트에는 샴페인의 발전에 기여한 영국의 엄청난 영향력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1. 샹파뉴 와인, 영국에서 유행하다

프랑스의 군인이었던 샤를 드 생 에브르몽 Charels de St. Évremond는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되어 1660년대에 영국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즐겨 마셨던 상파뉴의 와인을 영국으로 들여오기 시작했고, 그와 어울리던 영국의 고위층 사람들이 샹파뉴 와인을 전파하며 영국 상류사회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당시에 상파뉴와인은 스틸와인이었습니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스틸와인라 생각했었죠. 수입된 상파뉴 와인은 오크통에 담겨져 들여왔고, 그후 와인 상인들은 판매를 위해 와인을 병에 담아 코르크로 밀봉했습니다. 오크통에서 별 이상 없던 와인은 병입된후 날씨가 따뜻해지면 병속에서 또다시 2차발효로 탄산가스가 발생합니다. 와인을 오픈 했을때 어느정도의 탄산가스가 함유된 스파클링 와인이 되었죠.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영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영국에서 제작한 와인병입니다. 상파뉴에서는 종종 폭발하던 유리병이 영국에선 샹파뉴 와인 병을 열기 전까지 내부 압력을 견뎌냈던 것인데요. 영국은 이 당시 튼튼하고 강한 유리병을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2. 강한 유리병 등장하다

17세기 초, 영국은 급격히 인구가 증가하여 도시화가 시작됐고, 식민지 개척과 잦은 전쟁으로 목재 수요가 급증했어요. 이 당시 유명한 영국의 무적함대를 유지하기 위한 군함 건조에 목재가 부족해지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삼림이 황폐해지는 것을 우려한 영국의 왕 제임스 1세는 유리제작을 비롯한 모든 산업에 목재를 연료로 사용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습니다. 목재를 연료로 소진해 버리는 것 보다 군함 이나 건축에 사용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죠.

이러한 상황으로 당연히 유리제작의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는데요. 영국의 유리공들은 유리제작용 가마의 연료로 석탄을 사용했고, 더 높은 온도에서 더 두껍고 강한 유리병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산된 강한 유리병은 스파클링 와인의 높은 압력을 견딜 수 있었으며, 이는 샹파뉴와 그 스파클링 와인 산업의 발전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3. 당분을 추가하여 기포를 만들다

같은 시기에 스파클링 와인의 2차 발효에 관한 공식 문서도 영국에서 등장합니다. 1662년 영국의 과학자 크리스토퍼 메렛 Christopher Merret ”스파클링 와인의 2차발효를 위한 레서피“의 내용을 담은 논문이 그것 인데요. 이 논문에 그가 와인상인들에게 와인을 주문할때의 광경을 표현하길 “상인들이 와인을 더 신선하게  하고, 거품을 생성하기 위해 대량의 설탕과 당밀을 첨가했다”라고 묘사했습니다. 

샹파뉴의 와인이 영국으로 운송되는 기간동안 맛이나 신선도가 다소 떨어졌기 때문에, 상인들은 병입하는 과정에서 와인의 맛과 신선도를 개선하고자 다량의 설탕이나 당밀을 첨가했습니다. 와인 속에 남아있던 효모가 다량의 당을 추가로 섭취하면서 다량의 탄산가스가 발생하는 2차 발효로 이어지게 된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메렛이 그당시 이스트와 발효의 원리를 이해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이처럼 그당시 영국의 와인 상인들이 와인에 설탕을 첨가한것은 오늘날 샴페인의 2차 발효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효모와 당분을 첨가하는 리큐어 드 티라주 liqueur de tirage 의 시초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리큐어 드 티라주 liqueur de tirage는 다음 포스트에서 더 상세하게 말씀드릴게요.

4.마치며

1600년대 초반 영국인들은 튼튼한 유리병을 제작했고, 1660년대에 인위적인 2차 발효로 생산된 스파클링 와인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건 모두 돔 페리뇽이 1696년 상파뉴 수도원에 처음 들어간 훨씬 이전의 이야기죠. 역사적으로 볼때, 영국인들의 프랑스 와인에 대한 사랑은 대단해서 그 둘 사이에 100년 전쟁과 같은 분쟁도 많았지만 결국은 프랑스 와인이 크게 발전한 원인도 많이 제공했습니다.  

아무튼, 이 시기 이후 프랑스 샹파뉴의 스파클링 와인도 크게 발전하게 됩니다. 다음 포스트에는 프랑스에서도 당분으로 샴페인의 제조 기법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